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엥겔스 (문단 편집) ===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혁명가 활동 === 1844년, 마르크스와 파리에서 재회한 뒤로 그는 마르크스의 열성적인 동지이자 후원자가 된다. 마르크스는 심각한 [[악필]]이었는데, 이런 마르크스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엥겔스 뿐이었다. 이는 두 사람의 우정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다. 여하튼 마르크스와 함께 의인동맹에 가입한 후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바꾸고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함께 저술하였다. [[1848 혁명|1848년 유럽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엥겔스는 독일 각지를 전전하며 혁명 활동에 참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과 몇 차례 전투를 치루기도 했다.[* 엥겔스의 참전 경험은 이후 엥겔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울메이트 마르크스가 영국 내 좌파들 사이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엥겔스가 불리한 전투에서도 용감하게 활약했다는 증언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부상이나 장애 없이 퇴각하는데도 성공했기 때문에 평판이 더 높아진 것은 덤이었다.] 엥겔스는 공개수배 대상이 되었고, 엥겔스의 가족들까지 프로이센 경찰에 끌려가서 심문의 대상이 되면서 가족들에게 욕을 먹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자 결국 그는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엥겔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무신론자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을 무척 가슴아파했는데, 다른 한편으로 엥겔스는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하는 바람에 결국 정식으로 대학생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컴플렉스와 원망감을 가졌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엥겔스는 "제발 좀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나쁜 친구들과 그만 어울려다녀라"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호소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엥겔스의 여동생 역시 공산주의자와 결혼하자 분노한 엥겔스의 아버지는 엥겔스에게 보내던 용돈을 끊어버렸고, 엥겔스는 한동안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부쳐주는 용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으로 엥겔스의 친척 중 상당수가 반혁명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엥겔스가 혁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 때문에 자신들도 취조를 당하고, 같은 동네 이웃 자본가 가문들이 엥겔스 가족들을 험담하면서 엥겔스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 것은 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